몇 년동안 건축만 하다 IT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느낀 것중 하나는, IT 업계의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당히 단순화 시켜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쪽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눈과 뇌, 입력장치를 조작할 최소한의 운동기관만을 가진 생명체처럼 생각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존재다. 오랜시간동안 진화의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현재는 유효하지 않는 많은 불필요한 습관을 가지고 있고, 또 생존과 관련된 본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정도가 좀 지나친 비약이라면, 최소한 이쪽에선 세계를 다분히 2차원으로 인식하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긴 하지만, 경향이 있다는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전자책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전자책에 대한 논의가 되풀이 될때마다, 중요한것은 텍스트를 얼마나 소형의 매체에 집적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텍스트를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뿐이다. 좀 더 관심을 가지면, 화면의 품질이나 문자의 섬세한 정도가 이야기된다. 그런데 정말로 종이에 인쇄된 것과 동일한 품질의 화면을 가지고 또 충분한 텍스트가 확보된다면 그걸로 전자책은 인쇄물과 동등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일까?
책이라는것이 문자로 구성된 문장의 연속이고, 또 책을 본다는 것이 그 문장들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책은 결코 한면의 LCD 화면과 동등하진 않다. 책은 실제로는 수많은 페이지의 집합이고, 그 집합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물리적인 실체이다. 여기서 '책'은 단순히 문자를 저장하는 매체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책을 가지고 책장 어딘가에 꽃아놓을 수도 있고, 그 두께로 책의 분량을 짐작할 수도 있고 읽고있는 곳의 대략적인 위치를 찾을 수도 있다. 책장을 훌훌 넘기면서 책 내용을 대충 살펴볼 수도 있고, 심지어는 베고자거나, 책을 돌리거나, 표지에 낙서를 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일련의 책의 가진 속성들이, 책이 가지고 있는 사용자 경험이라고 생각된다. 수천년간 인류가 발전시켜온 섬세한 UX와 또 그와 연관된 인류의 직관적인 감각경험들이, 단순히 전자책으로 전환될 수 없는 인쇄물의 가치이다. 책의 두께, 표지를 구성하는 방식, 제본하는 방식 등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며, 한사람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오랜시간동안 최적의 결과를 위해 다듬어진 결과물들이다. 누군가는 5인치 남짓한 화면에 검색어를 입력하고 또 그것을 통해 책을 읽는 경험의 편리함을 이야기하겠지만, 누군가는 책이 가진 경험이 유용함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은 책은 그자체로 5인치가 훨씬 넘고, 인치가 아닌 제곱미터나 세제곱미터로 환산되는 공간속에 실재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전자책은 내 방 어딘가에, 놓아둘 수는 없다. 검색어로 책을 찾는 일이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가까운 서점을 찾아가면, 대략 500인치쯤 되는 아이맥스 스크린에 수많은 책의 표제를 한 화면에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 화면은 버벅임도 전혀없고, Full 3D로 제공된다. 마우스도 필요없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정말 현실감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정말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필요한 책을 찾아 헤멘적이 있다면, 인터넷에서 스크롤을 돌리며 책을 찾는 것보다, 서점에서 몇 걸음 걸으면서 관련된 책을 찾는게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자책으로 이런 정도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얼마나 수준높은 기술의 발전이 있어야 할까?

수많은 책들은 단순히 제목뿐 아니라, 크기, 두께, 색상, 표지구성 등 다양한 특징으로 인지된다. 적어도 책장안에서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서는 일일히 제목을 읽지 않아도 된다.물론, 전자책은 인쇄물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크기의 전자책 화면과 인쇄물은 결코 같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진 않는다는 점은 인정하자. 그리고, 정말로 전자책이 인쇄물을 전적으로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싶다면, '책'이라는 실체가 가지는 ux를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고, 그것들은 전자책에서 구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책의 두께, 부피 등이 전자책의 ux를 통해 구현되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책장을 넘기는 애니메이션 뿐 아니라, 책장을 후루룩 넘기거나, 책의 두께를 통해 읽고있는 곳의 위치를 가늠하는 등의 경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의 제목, 저자의 이름 뿐 아니라, 인쇄물의 형태, 크기, 색상 등등의 물리적인 특징을 통해 책을 인지하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내 책장에 있는 책의 제목을 하나하나 읽지않고도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의 일이 전자책에서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점점 전자책을 교재로 사용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교육심리학을 배운적이 있다면, 사람이라는 진화론적 존재가 '인지'하는 과정이 단순히 텍스트를 컨버팅해서 뇌에 저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만지고, 그 위에 낙서를 하고, 또 그 책을 어딘가에 두고, 또 꺼내는 일들이 모두 텍스트를 읽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서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던 인류가 가진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다. 궁극적으로 전자책이 그와같은 경험들을 거의 근접하게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현되기 전에 단순히 저장매체의 용량만으로 전자책이 모든 책을 대체할 것이라는 상상은 철없다. 그런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덧글